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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팜플렛] <가자, 체제전환 공동행동> 체제를 바꾸는 우리의 요구를 알리는 집중 공동행동 시-작!
일시
2024년 9~11월
장소
서울 일대

가자, 체제전환 공동행동

반전평화~ 주거권~ 반빈곤~ 노동해방~ 페미니즘~ 학생인권~ 기후정의 등~
체제를 바꾸는 우리의 요구를 알리는 집중 공동행동 시-작!

기후가 아니라 세상을 바꾸자
죽음조차 차별하는 세상을 바꾸자
전쟁으로 돈 버는 세상을 바꾸자
젠더폭력 조장하는 세상을 바꾸자
불평등이 재난이다 세상을 바꾸자

못살겠다 갈아보자 자본주의 갈아보자
임금은 올리고 자본주의는 내리자
생명을 지키고 자본주의를 버리자
차별금지법 만들고 자본주의는 부수자
진실은 밝히고 자본주의는 묻자

일거리가 아니라 일자리를 내놔라
일자리가 없으면 기업을 내놔라
부동산이 아니라 주거를 내놔라
주거가 없으면 토지를 내놔라
지원이 아니라 권리를 내놔라
권리가 아니면 권력을 내놔라


[여는 말] 해방을 위한 약속, 평등으로 - 가자! 체제전환

올해 초, 전태일재단과 조선일보가 협업하여 ‘12 대 88의 사회를 넘자’는 기획연재를 냈습니다. 불안정노동의 현실을 조명하는 기획에 여러 문제제기가 잇따랐습니다. 노동의 권리 후퇴에 앞장서는 조선일보라는 매체도 문제, 기간제 자체를 문제 삼는 대신 2년 제한 기간을 연장하자는 류의 대안도 문제로 지적되었습니다. 그러나 매체나 정책보다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습니다. 전태일 정신을 ‘낮은 곳을 향한 나눔과 실천’으로 주장한 것입니다.

전태일은 약자를 보호하는 강자를 자처한 적이 없습니다. 전태일은 우리가 모두 동등한 사람임을 일깨우며 평평한 땅을 만들려고 했습니다. 법이 찾아와 권리를 주지 않으며 스스로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투쟁할 때 법전의 권리가 잠을 깬다는 점을 보여줬습니다. 윤석열 정부가 ‘노동약자 보호’를 내세우며 노동의 권리 제한을 정당화하는 지금 전태일 정신을 평등정신으로 기억하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누군가 앞장서고 누군가 가진 것을 내려놓는 것이 아니라 체제가 만들어내는 불평등을 함께 넘어서려고 할 때 해방의 약속이 시작됩니다.

기득권 정치는 불평등을 완화하는 시늉은 할지언정 불평등을 철폐하려 들지 않습니다. 그들은 오직 권력의 분점 구조를 바꾸는 데 관심이 있으며 함께 공유하는 권력의 독점 구조를 바꿀 생각은 없습니다. 우리가 싸워야할 곳은 바로 이곳입니다.

전태일 정신을 평등정신으로 기억할 때 그것은 노동자의 것이기만 하지 않습니다. 지금 전태일 정신은 고용허가제 폐지를, 딥페이크 강력 처벌을, 차별금지법 제정을, 팔레스타인 해방을 요구하는 목소리와 만납니다. 윤석열 퇴진 요구에 갇힐 수 없는, 우리 스스로의 해방을 위한 요구들을 더욱 크게 외칩시다.

고물가, 기후위기, 돌봄위기, 지역 위기 등 우리가 마주한 문제 중 자본주의가 초래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이런 문제는 자본주의의 부작용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너무나 자신의 목적에 충실한 결과입니다. 우리 앞에 드리운 부정의와 폭력의 구조를 비가역적으로 변화시키며 자본주의와 단절하는 체제전환운동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전환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불평등에 맞서 투쟁해 온 우리의 현장들이 바로 전환의 출발지입니다. 곳곳에서 새로운 세계를 피워내는 도전의 목록을 함께 기억합시다. 신자유주의 보수 양당이 더 이상 우리의 목소리를 지우지 못하도록 우리가 체제전환의 세력이 됩시다.


[1부] 먹고살기 어렵다, 왜?

1-1 우리에게 필요한 건 대출이 아니었다

빚을 갚지 못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습니다. 대출만기가 3개월 지났거나 6개월이상 연체하는 ‘신용유의자’가 지난 7월 말 59만 2,560명이 되었다고 합니다. 특히 늘어난 것은 대부분 소액채무자인 20대 신용유의자입니다. 수십만원에서 수백만원의 대출을 갚지 못하고 금융과 빈곤의 함정에 빠진 이들입니다. 학자금 대출 체납 인원은 5만명을 넘어섰습니다.

한국의 가계부채는 다른 나라들과 비교할 수 없이 높습니다. 국내총생산보다 가계부채가 많고, 가처분소득 대비 가계부채가 200%를 넘어갑니다. ‘갚기 위해 돈을 버는 것’같은 이 위태로운 구조는 금융의 측면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빚이 얼마든 이자를 붙여 갚기만 하면 이는 경제 성장 수치에 기입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빚을 많이 지도록 하는 것 역시 자본주의의 능력 중 하나입니다. 문제는 가계부채의 원인과 결과입니다.

한국에서 가계부채 문제는 IMF 경제위기 이후 시작 되었습니다. 기업보다 가계 대출을 활성화하는 것은 신자유주의 금융의 특징이기도 한데요, 기업들이 이윤을 내기 어려워지는 조건에서 가계에 대출하는 것이 수익을 내기 더 좋았기 때문입니다. 경제위기로 직장을 잃고 자영업 시장에 뛰어들어야 했던 사람들, 주거비와 의료비와 등록금을 마련하느라 목돈이 필요했던 사람들이 줄을 서는 때니 명분도 있었습니다. 정부는 소득이나 신용이 부족해 대출 받기 어려운 사람들을 위한 정책금융상품을 만들어 거들었습니다. 마치 빚이 혜택이나 복지라도 되는 것처럼요.

하지만 빚은 덫일 뿐입니다. 가계부채라고 똑같은 부채는 아닙니다. 자산과 소득이 많은 계층일수록 더 싸게, 더 많이 돈을 빌리고, 이를 통해 다시 자산을 늘립니다. 그러나 생계를 꾸리기 위해 빚을 져야 하는 계층일수록 적은 돈을 빌리면서도 높은 이자를 지불해야 하고 상환을 하기는 더 어렵습니다. 가계부채의 대부분은 부동산 관련 대출입니다. 개인들이 받은 주택담보대출은 부동산 시장으로 흘러들어가 부동산 가격을 상승시키고, 집값이 계속 오르니 대출을 받지 않을 도리가 없는 악순환이 거듭됩니다. 집을 사지 않더라도 세입자들은 전세금이나 보증금을 마련하기 위해 대출을 이용합니다. 누구의 손에서 터질 지 모르는 대출 폭탄 돌려막기가 사회 전체에 만연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자본주의에도 위기입니다. 적당히 빚을 갚게 하는 데 실패하면 금융시스템이 위태로워지기 때문입니다. 무분별한 부동산 담보 대출이 순식간에 무너져내린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가 그랬습니다.

최근 정부 기관들 간 금리정책에 엇박자가 나고 있습니다. 금리를 올리면 빚을 갚지 못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금리를 낮추면 부동산 시장이 불안정해지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8월 주택담보대출 증가 폭이 역대 최대를 기록했습니다. 대출을 관리해야 하지만 실수요자는 대출받을 수 있게 하라. 이게 정부가 고심하는 숙제인데, 과연 가능할까요?

우리가 먼저 질문해야 할 것은 따로 있습니다. 우리는 왜 대출의 수요자가 되어야 했을까요? 우리는 집이 필요했지 대출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공부를 하려니 학자금이 필요했고, 하루하루 정직하게 장사할 공간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정부는 이 모든 것을 금융기관의 대출을 통해 각자 해결하도록 했습니다. 집이 필요한 이들에게 집을 마련해주는 것은 ‘재정 낭비’지만, 대출을 통해 집을 사고 파는 것은 ‘경제 활동’인 것이 자본주의 질서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답게 살기 위해 필수적인 재화와 서비스를 보장하는 ‘사회’의 책임을 지우고 ‘시장’만 만들어온 자본주의가 원인입니다. 집 있는 사람은 집을 더 불리게 하고 집 없는 사람은 더 빚 지게 해온 부정의를 바로 세워야 합니다. 필수적인 것이 모두의 기본적 권리가 될 수 있도록 공공성을 재구축해야 합니다.

1-2 꼬여버린 한국 경제, 우리의 질문

먹고살기 점점 더 어려워지니 모두들 경기가 풀리기를 기대합니다. 정부는 그런 기대에 부응하는 듯 경제성장률이 높아질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그런데 한국개발연구원(KDI)은 8월에 경제전망을 수정하면서 기존(2.6%)보다 낮은 2.5%를 예상했습니다. 한국은행도 같은 수치를 내놓았고요. 두 기관이 공히 지적하는 것은 수출과 내수의 괴리입니다. 반도체 경기가 좋아지면 수출이 늘 것이지만, 이것이 내수 회복으로 이어지지 않을 것이라네요. 내수 경기가 침체중이니 물가는 조금씩 가라앉고 있지만, 물가가 안정된들 일자리가 부족하니 상황이 나아지지는 않습니다.

수출을 통해 한국의 경제발전을 이룩한다는 기대는 신화에 불과합니다. 대기업이 수출로 큰 돈을 벌어도 사회 전체의 부로 이전되지 않습니다. 이는 IMF 경제위기를 전후해 일어난 변화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 IMF 외환위기를 일으켰던 대기업과 금융기관들은 정부의 엄청난 지원을 통해 회생 할 수 있었지만, 중소기업을 비롯한 국내 경제 기반은 모조리 무너졌습니다. 노동자들은 대규모 정리해고와 노동조건 후퇴에 직면했습니다. 대기업들은 변화하는 세계 경제의 흐름에 편승해 수출 중심 기업으로 변모하고, 국내 투자는 줄였습니다. 이들은 더 저렴한 노동력과 자원을 찾아 해외로 자리를 옮기거나, 더욱 불공정한 원하청 계약으로 국내 중소기업을 옥죕니다. IMF를 놀라게 할 정도로 빨랐던 IMF 조기 종료는 몇몇 대기업의 ‘나홀로 성장’이었을 뿐이었고, 수출 증가와 내수의 연관은 점차 사라졌습니다. 한국이 위기를 극복한 방식이 바로 오늘 날 위기의 원인인 셈입니다.

한국은 세계적 인플레이션을 함께 겪고 있습니다. 하지만 출구가 마땅치 않습니다. 한편으로는 IMF 위기를 거치며 미국과 중국의 경제안보전략 사이에 딱 끼는 위치에 놓이게 되었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구조적으로 많은 문제들이 누적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부동산 시장의 불안정성, 부채 상환 부담 등 피해가 서민들에게 집중되고 있음에도, 세계적 경제위기는 오히려 임금을 끌어내리는 핑계가 됩니다. IMF 위기가 노동자의 권리를 빼앗는 핑계가 되었던 것처럼 경제 위기는 우리의 권리를 유예시키는 손쉬운 명분이 됩니다. ‘한강의 기적’도 결국 착취의 다른 이름이었던 것처럼요.

우리에게는 다른 질문이 필요합니다. 어떻게 다시 경기가 살아날 수 있어? 이렇게 묻는 것은 구조를 개선하기는커녕 더욱 악화시킵니다. 지표가 경제성장, 더욱 구체적으로는 기업의 이윤이기 때문입니다. 보수 양당이 합심하여 반도체 산업 지원에 앞장서고 노동자의 권리 대신 노동자 ‘보호’를 말하는 이유도 그것입니다. 건설경기 부양도 꾸준한 정부 기조였는데요, 건설사가 폭리를 취하는 동안 우리의 주거생활이 나아지지 않았다는 점도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우리는 사람답게 살 수 있어?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답해야 하는 질문입니다. 사람답게 사는데 필요한 반도체는 몇 개일까요? 반도체를 만들다 병을 앓는 노동자 문제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용인에 삼성 반도체 클러스터가 생기면 하루에 134만톤의 물을 쓴다는데, 기후위기 시대 모든 강물을 말라붙게 만드는 반도체 공장을 세워도 되는 걸까요? 경제는 산술이 아니라 정치입니다. 전문가가 아니니 경제를 논하지 말라는 거짓말에 속지말고, 우리의 삶과 세계를 어떻게 만들어갈지 우리의 전망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잠깐 물가 이야기를 해볼까요? 한국의 식료품 가격은 OECD 평균 대비 1.5배 이상으로 고물가의 주요 요소입니다. 금사과, 대파값, 금배추 등 종류를 달리하며 우리를 놀래키는데요, 기후위기가 농산물 생산을 불안정하게 만들고 있다는 점은 잘 알려져있습니다. 그래서 정부는 고물가 대책으로 일단 무관세 농산물 수입을 마구 늘립니다. 우리의 밥상을 위한 대책이니 괜찮은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농민들은 기후위기로 인한 피해와 농산물 수입으로 인한 피해를 이중으로 부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더욱 근본적으로는 ‘값싼 식량’ 공급이 유일한 목표가 되면서 농의 기반이 무너져온 구조에 있습니다. 우리 앞에 놓인 질문은 경제구조를 재설계하기 위해서 더욱 긴요합니다. 자본주의는 필요를 위해 생산하지 않습니다. 이윤 창출이 궁극의 목적입니다. 지배계급이 주어진 구조에서 경제성장률만 쳐다보는 것은 체제를 넘어서는 상상을 하지 못하는 무능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과 세계에 무엇이 필요한지, 어떻게 생산할지 물어야 합니다.

1-3 돌봄 위기로부터 새로운 도전을

1개 이상의 부업을 하는 ‘N잡러’가 55만 2천 명으로 집계(2024년 1분기)됐습니다. 증가세가 가파른데 청년층의 증가 폭이 가장 컸다고 합니다. 아마도 많은 이들이 플랫폼을 통해 일을 구하고 있을 텐데요, 이는 일하는 시간과 쉬는 시간의 경계가 갈수록 사라진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자신을 돌볼 시간도 남을 돌볼 시간도 줄어드는 것입니다.

여성의 삶이 늘 그랬습니다. 일과 가사 노동을 병행하면서도 여성의 일은 부업 취급을 당하며 권리를 제한 받았습니다. 청소, 돌봄과 같이 ‘여성의 일’로 인식되는 노동은 저임금 일자리로만 설계되었습니다. 가사 노동을 포함하면 총 노동시간의 50% 이상을 늘 여성이 담당했다는 연구들이 있는데요, 이 초과노동의 대가는 임금이 아니라 차별이었던 셈입니다. 이 차별이 폭발한 오늘날의 돌봄 위기는 오랫동안 누적된 젠더 부정의의 결과입니다.

한국에서는 2000년대부터 돌봄에 관한 논의와 제도화가 본격화됐습니다. 여성에게 돌봄을 떠넘기려면 얼마간 ‘남성 생계부양자’의 환상이라도 유지되어야 하는데 IMF 이후 그것은 불가능해졌기 때문입니다. 정부는 여성이 일과 가정을 양립할 수 있게 하겠다며 여러 대책을 내놓았지만, 이는 기껏해야 일정한 시간동안 돌봄을 맡길 수 있는 서비스 시장을 만드는데 그쳤습니다. 기존의 젠더 불평등을 해소하지 않고 수립된 대책은 실효성이 없었습니다. 코로나19 시기 각종 보육시설 등이 문을 닫자 직장을 그만두고 홀로 양육 부담을 져야 했던 여성이 많았던 것 역시 일례입니다.

돌봄이 필요한 이들 역시 행복하지 않습니다. 2000년대 초 30%였던 보육률이 2010년 이후 80%를 넘어서고, 노인장기요양보험 도입 이후 요양병원은 2008~2016년 사이 약 2배, 요양시설은 2.4배 증가했습니다. 아이든 노인이든 맡길 곳은 많아졌습니다. 그러나 ‘맡겨지는 사람’이 될 뿐인 이들은 돌봄받는 과정에서 존중받으며 사회적 관계가 확장되는 경험을 하기 쉽지 않았습니다. 장애인 거주 시설에서 자주 고발되던 것처럼 어린이집이나 요양원의 인권침해 및 학대 사건이 알려지곤했습니다.

돌봄노동자의 위치에서도 권리 침해 경험이 흔합니다. 보육교사, 요양보호사, 간병인 등 누군가를 돌보는 노동자들이 저임금에 쉬지 못하고 이용자의 폭력에 노출되거나 괴롭힘 당하는 현실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 필수적인 돌봄서비스가 시장에서의 수익을 목표로 하는 공급기관들에 맡겨졌을 때 벌어지는 일입니다. 사회적 지출은 늘지만 돌봄의 순환은 이루어지지 않는 구조가 여기서 비롯됩니다.

사실 한국의 돌봄 위기는 농촌이 먼저 겪었습니다. 그 해법으로 정부가 촉진한 것이 결혼이주였고 많은 이주여성들이 노인과 남성을 돌보며 출산과 육아까지 맡아야 했습니다. 최근 돌봄서비스를 ‘더 싸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자며 가사도우미 고용허가제를 시작한 것도 비슷합니다. 돌봄을 ‘남’한테 맡기는 것이 경제적이라는 관점에서 차별의 구조가 더욱 견고해집니다.

생산과 재생산의 이분법은 자본의 이윤 창출을 위해 만들어진 환상입니다. 출산과 육아는 ‘일을 쉬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일’을 하는 시간입니다. 우리 사회가 어떻게 돌봄을 사회화 할 것인가 묻기 위해서는 몇 가지 ‘여성’ 정책이 아니라 변화한 사회 구조에서 돌봄이 어떤 일이 되어야 하는지 질문해야 합니다. 1인가구가 늘어나고 영케어러가 사회적으로 등장하는 추세는 돌봄을 특정한 집단에 할당된 문제로 다루는 시도가 실패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어떻게 돌보는 시간을 누리고 돌볼 방법을 익힐 수 있을까요? 돌봄받으며 자유로워

지고 역량이 증대하는 경험은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을까요?

삶의 재생산을 가족에 전가할 수 없게 된 변화는 가족이 자본 축적의 거점이 되기 어려워지는 변화와 맞물려 있습니다. 이는 위기인 동시에 우리가 친밀성과 돌봄의 구조와 거점을 새롭게 만들어갈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돌봄을 특정한 서비스로 상상하거나 물질의 생산과 구분하는 것을 넘어서 우리 사회가 작동하는 원리와 물적 토대를 재구축하기 위한 실마리로 삼는 것이 필요한 때입니다. 돌봄 사회로 가려면 노동시간 단축과 함께 어떤 노동을 줄이고 어떤 노동을 늘릴 것인지 고민해야 합니다.


[2부] 더 나은 세계를 상상할 자리는 어디에

2-1 고립과 균열

외로움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말 중 하나입니다. 영국 정부는 ‘외로움부’를 신설하기도 했다고 하니 우리만 겪는 문제는 아닌 듯합니다. 사회적 관계로부터의 고립과 단절은 고독사와 같은 안타까운 소식으로, 이상동기범죄와 같은 두려운 소식으로 우리를 찾아옵니다. 관계에 도전하려면 두렵고 관계로부터 물러나면 외로운 현실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요?

견고해보이던 자본주의 질서가 흔들리면서 가족도 일터도 지역사회도 관계를 안정적으로 만들어가는 거점이 되기 어려워졌습니다. 일터에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서로의 이름을 모르는 것이 어색하지 않은 사회가 됐습니다. 물론 모두가 똑같이 흔들리지는 않습니다. 자산이 많고 소득이 높은 계층에게 가족은 새로운 생애 전략을 만들어가는 거점이 됩니다. 하지만 가난할수록 ‘가족’은 탈출할 수도 진입할 수도 없게 되는 선택지로 남습니다. 학력과 인맥을 자원으로 공유하는 가족은 안정적인 일자리와 높은 자산으로 서로를 끌어주지만, 그렇지 못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미끄러지듯 불안정한 일자리로 밀려납니다. 가족의 양극화 속에 ‘가족 자원’이 없는 사람들은 더욱 치열한 양상으로 경쟁합니다.

미래를 기대하거나 희망을 말하기 어려운 현실에서 사람들은 무언가 빼앗기지 않으려는 동기에 더욱 붙들리게 됩니다. 그만큼 타인을 무언가 빼앗아가(려)는 존재로 보게 되고 ‘안전’이 지상과제가 된다는 뜻입니다. 몇 년 전 예멘 난민이 입국하자 ‘국민이 먼저’라며 강력하게 반대 시위가 일어났던 일처럼요. 실제 무언가 빼앗기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 아닙니다. 노동자가 파업을 하는 것이 시민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처럼, 교사의 권리가 학생 인권 때문에 후퇴하는 것처럼 ‘가짜 대립’을 만들어온 통치의 문법 때문에 사람들은 대립합니다.

무언가 이미 빼앗겼다고 항의하는 목소리도 높아집니다. 미국에서 백인 노동자들의 처지가 악화된 것이 흑인의 권리가 늘었기 때문이라며 ‘구조적 인종차별은 없다’고 주장하는 목소리는 한국에서 남성 청년의 취업이 어려워진 것이 여성의 권리가 늘었기 때문이라며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고 주장하는 목소리와 닮았습니다. 사회가 불안정해지면서 가족의 보수적 가치를 강조하는 흐름도 거세집니다. 페미니즘의 성취를 거슬러 임신중지의 권리를 부정하거나 젠더 규범을 강화하기 위해 성소수자의 권리를 부정하는 ‘백래시’도 전세계적 현상입니다.

이와 같은 흐름들은 저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집게손가락’ 하나때문에 노동자가 해고되고 기업들이 사과문을 내는 난리통이 일어나는 것은 마치 ‘집게손가락’에 일말의 진실이 있다는 듯 대우하는 정치인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여성의, 장애인의, 성소수자의, 이주민의, 청소년의 목소리를 특수하거나 유별난 목소리, 당신의 몫을 빼앗는 요구라고 선동합니다. 혐오의 정치는 사회구성원 간 신뢰의 기반을 무너뜨리고 서로 의심하고 적대해야 하는 사회를 만듭니다. 그러나 앞서 짚었듯 모두가 똑같이 흔들리지는 않습니다.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지위가 낮은 집단 안에서 파이 다툼이 벌어지는 동안 지배계급의 식탁에는 갓 구운 파이가 끊임없이 올라가고 또 버려집니다.

2-2 보수 양당이 장악한 정치

정치는 왜 이토록 엉망일까요? 정치인들이 민생에 관심 없거나 무능하기 때문일까요? 오히려 그들이 너무 일을 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전국을 돌아다니며 ‘민생 토론회’를 열고,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먹사니즘’이 유일한 이데올로기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정부와 국회가, 거대 양당이 서로 잡아먹을 듯이 싸우지만 “성장의 회복과 지속성장이 곧 민생이자 ‘먹사니즘’의 핵심”이라는 이재명 대표의 말은 윤석열 대통령이 한들 어색하지 않습니다. 지역마다 민생토론회에서 약속한 각종 개발 사업과 수십조 원 규모의 반도체 산업 지원이 야당의 정책이라한들 어색하지 않은 것처럼 말입니다. 문재인 정부도 윤석열 정부도 청년의 자산 형성을 지원하겠다며 저축상품을 만들었지만 취업하지 못한 청년은 가입할 수 없고 저소득 청년의 중도해지율이 더 높게 되는 현실에 대해서는 아무말도 하지 않습니다. 경제가 성장한들 살림이 피지 않고 민생을 지원한들 불평등이 해소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모두가 알아버린 진실입니다. 거대 양당은 오직 이 진실을 건드리지 않는 범위에서만 다툽니다.

윤석열 정부와 민주당 국회가 벌이는 공방은 본회의 강행 통과와 거부권 행사를 오가며 정치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갑니다. 하지만 양당은 기업 지원, 부자 감세, 군수산업 육성 등에 관해서는 논쟁하지 않습니다. 주주 환원은 챙기지만 임금 인상은 챙기지 않고, 부동산 세제는 걱정하지만 임대료 부담은 걱정하지 않습니다. 대학입시 제도는 고심하지만 고졸 청년의 현실을 고심하지 않고, 친일 대 반일은 선명하지만 팔레스타인의 반식민 투쟁은 못 본 척합니다. 기후위기 대응도 성차별 해소도 거론하지 않습니다. 대통령실은 김건희 방탄, 민주당은 이재명 방탄을 위해 상대를 공격하고 자신이 주도권을 쥐는데 유리한 의제를 활용할 뿐입니다. 채상병 특검법, 노조법 개정 등 중요한 과제는 정쟁에 소모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마주한 정치의 위기는 하필 대통령이 윤석열이고 하필 야당 대표가 이재명이라 생긴 위기가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반-민주주의인 신자유주의가 낳은 귀결입니다. 한국에서 신자유주의적 재편을 주도한 것은 민주당이었습니다. 국가폭력을 동원하여 구조조정을 관철시키고 노동조합을 ‘이기주의’에 빠진 조직이라고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공기업을 민영화하고 민간의료보험에 날개를 달아줬습니다.

많은 국가들에서 보수적 정당이 벌인 일을 한국에서는 민주당이 맡았습니다. 그리고 많은 국가들에서 진보적 정당이 주도한 일을 한국의 민주당은 맡지 않았습니다. 임신중지 권리, 동성혼 법제화가 미국에서 공화당과 민주당의 분별점이 되기도 하는 지형과는 딴판입니다. 민주당은 국가인권위 설립, 여성부 신설 등에 나섰지만 성평등에서 양성평등으로 후퇴하고 차별금지법 반대 세력에 힘을 실어주다가 차별금지법 반대한다는 국가인권위원장이 임명되는 사태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민주당이 보수적이라는 데 있지 않습니다. 신자유주의의 두 분파 간 다툼이 정치 전체를 장악한다는 데 있습니다.

윤석열 정부가 노동약자를 보호하겠다고 나섭니다. 김문수를 노동부 장관으로 임명하면서 그러니 기가 찰 따름입니다. 하지만 불안정 노동자의 권리를 파괴하는 자본의 책임을 묻는 대신, 노동법 밖에서 이런저런 지원을 하겠다는 선심성 대책만 늘어놓기는 민주당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누가 노동자를 더 잘 보호하느냐가 아닙니다. 누가 노동자를 약자로 만들어왔는가입니다. 누가 여성을 더 잘 보호하느냐가 아니라, 구조적 성차별이 어떻게 방치되었는가 물어야 합니다.

더 나은 세계를 만들어갈 정치를 복원하는 것은 양당에 맡길 수 있는 과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마주한 부정의와 폭력의 구조를 변화시키는 일은 우리 스스로 세력이 되어가는 만큼 가능해집니다. 대안을 조직하며 세력화 하고자 한다면 우리 자신의 전망으로 말 걸기를 시작해야 합니다.


[3부] 윤석열 퇴진으로 모인 분노와 답답함을 세상을 바꾸는 체제전환 투쟁으로!

3-1 윤석열 퇴진, 기대와 현실 사이에서

22대 총선 결과를 놓고 모두가 ‘윤석열이 심판되었다’고 평가했습니다. 총선 이후 윤 대통령의 국정운영 지지율은 20%대로 떨어져 줄곧 비슷한 수준에 고착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총선 이후 펼쳐진 정치의 풍경은 도대체 무엇이 달라졌는지 찾아보기 어렵게 합니다. 그래서 더욱 ‘퇴진이 답이다’라는 주장에 귀가 솔깃해집니다. 동시에 퇴진 이후가 이재명이라면 그게 답일 수 없다는 답답함도 쌓여갑니다. 답답하다고 싸움을 미룰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일단 싸우고 보자며 이후를 미룰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싸워야 할까요?

우선 현실을 냉정하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윤석열 의 퇴진은 ‘조기 대선’이 치러진다는 뜻이고 현재의 지형과 조건에서 민주당의 집권으로 귀결될 것은 분명합니다. 마치 결말이 열린 정치적 격변을 기대하듯 윤석열 퇴진 투쟁을 말하는 것은 객관적 조건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결말이 예정됐다고 투쟁이 무용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 결말이 또다른 변화의 계기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려면 투쟁을 주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문제는 윤석열 퇴진으로 모이는 요구가 다시 민주당의 권력을 강화하는 모순적 현실에 우리가 놓여있다는 점입니다.

박근혜 퇴진 촛불에 앞서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심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헌법재판소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선거법과 헌법수호 의무를 위반했다고 인정했지만 그것이 공직자를 파면할 정도로 중대한 위반은 아니라는 판단을 내놓았습니다. 또한 “불성실한 직책수행과 경솔한 국정운영으로 인한 정국의 혼란 및 경제파탄”에 관해 “정치적 무능력이나 정책결정상의 잘못 등 직책 수행의 성실성 여부는 그 자체로서 소추사유가 될 수 없”다고도 했습니다. 박근혜 파면 결정도 이러한 범위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세월호 참사에 관한 생명권 보호 의무 위반은 인정되지 않았으나, 최서원에게 문건을 유출한 것이나 기업에 재단 출연을 요구해 부담과 압박을 느끼게 한 것은 파면할 만큼 중대한 사유가 되었습니다. 재산권과 경영의 자유가 그만큼 중대한 것이었음을 확인한 결정이기도 한 셈입니다.

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정치적 비판과 탄핵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윤석열 정부를 비판할 이유는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이것이 그대로 탄핵소추의 내용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조국혁신당 당대표가 윤석열 탄핵을 위한 ‘스모킹건을 발굴’하겠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3년은 너무 길다”며 쏟아낸 윤석열 정부 실정 비판이 그대로 탄핵소추안이 될 수 없음을 이들도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은 윤석열 탄핵이 쟁점이 될수록 거대 양당이 공모하여 만들어 낸 삶의 위기보다 양당이 첨예하게 맞서는 지배계급 내부의 갈등이 주목받게 된다는 점입니다.

어디에서 어떤 식으로 위기가 터져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정세는 유동적입니다. 그러나 정세의 불안정성이 높다고 그대로 운동의 기회가 되지는 않습니다. 광장의 촛불이 먼저 타오른 2016년과 달리 ‘윤석열 탄핵’은 민주당이 주도하게 되는 조건에 있습니다. 지금 한국사회에서 운동이 대안의 구심이 될 만한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지 묻는다면 답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윤석열 퇴진 투쟁을 운동이 도약할 계기처럼 상상한다면 운동의 가능성은 오히려 축소됩니다. 체제에 균열을 내는 투쟁들이 쌓여 정권 퇴진을 이룬 것이지 거꾸로는 아닙니다. 윤석열을 퇴진시킨다고 개별 투쟁들이 승리하거나 세상이 바뀌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더 깊은 분노, 더 크게 세상을 흔들고 싶은 마음들이 윤석열 퇴진 투쟁으로 모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런 마음들이 새로운 세상의 불씨가 될 수 있도록 체제전환운동으로 초대해야 합니다.

유동적인 정세에 더욱 적극적으로 개입하고자 한다면 우리 자신이 책임지는 투쟁을 더욱 단단하게 만드는 것이 우선입니다. 개별 투쟁의 요구들을 윤석열이 퇴진해야 하는 이유로 모으는 데 그치면 투쟁의 성과는 민주당의 성과로 흘러가고 맙니다. 윤석열 퇴진으로 해결되지 않는 우리의 요구 그 자체를 분명히 하는 투쟁을 강화해야 합니다. 윤석열을 임기 내 끌어내리고 싶은 의지들을 모아 자본주의를 흔들 때 정권도 흔들립니다.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다고 절망에 익숙해지지 않도록 서로를 지키며, 윤석열부터 퇴진시키고 보자며 우리의 해방을 미루는 대신 다른 세상을 향한 우리의 길을 더욱 넓힙시다. 체제전환의 요구가 모일 때 체제전환의 길이 넓어집니다.

3-2 평등을 향한 정의로운 전환, 가능하다

자본주의는 평등을 망각시킵니다. 모두의 것이었던 땅과 물과 지식을 사유화하고, 생산수단을 소유한 계급에 노동자가 종속되도록 만듭니다. 불평등을 지속시키기 위해 인종주의를 발명하고 젠더구조를 통해 차별을 정당화합니다. 피억압 민중을 특정한 이해관계를 가지는 무수한 집단으로 분할하고 대립시키며 부정의의 알리바이로 동원합니다. 돌봄 위기든 교육현장의 붕괴든 자본주의 실패의 책임을 힘없는 이들에게 떠넘깁니다. 자본주의를 넘어서고자 하는 체제전환, ‘평등을 향한 정의로운 전환’이 실마리입니다.

한국사회에서 평등의 요구는 언제나 불온했습니다. 평등을 요구하는 이들은 ‘빨갱이’ ‘페미’ ‘종북’ 등으로 불렸고, 위험하거나 철이 없거나 문란하거나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는 존재로 낙인찍혔습니다. 만인이 평등한 세상에서 작동할 수 없는 자본주의는 어디서나 새로운 차별을 만들어냅니다. 우리 운동의 요구들을 평등을 향한 것으로 모아내면서, 운동 안에서부터 평등이 흐르게 하면서, 자본주의 너머로 길을 냅시다.

그저 평등을 말하는 것으로 평등세상을 만들 수는 없습니다. 만인이 평등한 세상은 만물을 공유하는 세상에서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소유하지 않고 충분히 누릴 수 없는 사회에서 우리는 각자의 소유물을 늘리기 위해서만 질주해왔습니다. 이는 불평등을 정당화합니다. 집과 밥, 약과 같은 생존에 필수적인 것들을 박탈당한 상황을 ‘부정의’가 아니라 개인의 실패로 인지하게끔 만듭니다. 한편에서는 공공의 것이었던 땅과 물, 공공이 소유하고 통제해야 마땅한 교통과 전기와 같은 것들을 사유화해 소수가 부를 축적합니다. 이렇게 돈을 번 사람들은 기후위기에 공동으로 대응할 사회 인프라를 건설하는 대신 자신만을 위한 벙커와 탈출 우주선을 제작합니다.

강력하게만 보이는 자본 대신 모두가 나누어 갖자는 말이 허황된 꿈처럼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자본이 만든 것 처럼 보이는 이 세계는 사실 우리의 노동, 우리의 돌봄으로 만들어진 것임을 기억합시다. 저 높은 건물과 깊은 지하도, 이곳을 쓸고 닦고 유지하는 노동 모두가 우리의 손끝에서 출발했습니다. 우리의 노동과 돌봄이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따라 세상은 달라집니다.

‘정의로운 전환’은 화력발전소 폐쇄에 따른 노동자 일자리를 보장하라는 목소리에서 출발했습니다. 기후위기 시대 화력발전소 폐쇄를 받아들이되, 노동자들의 삶이 삭제당해서는 안 된다는 결연한 목소리가 ‘정의로운 전환’이라는 구호에 담겨있습니다. 발전소가 배출한 탄소와 노동의 권리 박탈에 대한 책임을 자본과 국가에 분명히 묻고, 새로운 권리를 만들어간다는 점에서 ‘정의로운 전환’은 우리 사회 곳곳에 다양한 방식으로 이식될 수 있습니다.

여성에게 돌봄 책임을 전가하고 장애인을 시설로 보내고 농촌을 값싼 식량 생산 기지로 전락시키고 동물을 인간의 필요에 종속시키고… 켜켜이 쌓인 부정의에 대한 책임에 제자리를 찾아주는 것이 정의로운 전환입니다. 저마다의 운동에는 이미 전환의 요구들이 있습니다. 탈시설, 노동시간 단축, 성산업 해체, 농생태적 전환, 주거권, 공공재생에너지, 팔레스타인 해방 등 평등에 대한 감각으로 길어올린 전환의 요구들입니다. 우리의 과제는 이러한 요구들을 연결하며 대안체제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무엇이 필요하고 어떻게 만들지, 얼마나 생산하고 어떻게 나눌지, 어떻게 돌보며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갈지 우리의 목소리로 이야기합시다. 대안은 없는 것이 아니라 지워졌을 뿐입니다. 우리가 세력이 되어가는 만큼 대안도 조직됩니다.

전환은, 민중이 주도할 때만 정의로울 수 있습니다. 부정의의 역사 속에서 빼앗긴 민중의 권력을 되찾는 것이 정의를 가능하게 합니다. 위험한 일로부터 안전을 지키려면 위험을 감수하는 수당보다 위험을 다룰 수 있는 권력이 필요합니다. 젠더폭력으로부터 안전을 지키려면 남자로부터의 보호보다 구조적 성차별에 맞서는 저항과 연대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함께, 세상을 바꾸는 ‘우리’가 되는 만큼 전환이 이루어집니다. 여러 운동이 품은 미래와 현실의 투쟁을 우리가 공동의 것으로 만드는 데서부터 전환이 시작됩니다.

체제전환운동의 미래는 지배계급 내부의 균열로부터 열리지 않습니다. 평등을 이루려는 우리 자신을 세상에 등장시킬수록 미래가 열립니다. 평등을 향한 정의로운 전환을 함께 시작하는 우리가 됩시다.


가자! 체제전환 공동행동

발행 | 2024년 10월 5일
글 | 체제전환운동 정치대회 조직위원회
주소 | (04018) 서울특별시 마포구 동교로 31 (2F)
홈페이지 | gosystemchange.kr
전자우편 | go.systemchange@gmail.com
값 |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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